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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 속초 ] 에 산다 ep 5. 스물아홉 중간결산 보고
등록일
2021.09.27
조회수
289
첨부파일

나는 [ 속초 ] 에 산다 첫 번째 이야기 보러 가기

나는 [ 속초 ] 에 산다 두 번째 이야기 보러 가기

나는 [ 속초 ] 에 산다 세 번째 이야기 보러 가기

나는 [ 속초 ] 에 산다 네 번째 이야기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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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살다 - 마지막 연재 

스물아홉 중간결산 보고




아홉수



‘아홉수’라는 말이 있다. 9, 19, 29··· 아홉이 들어가는 해에는 이사나 결혼 등 중요한 일을 피하라는데,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신 같은 이 단어가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나는 그저 12월 31일을 지나 1월 1일을 맞이했을 뿐인데, 나를 ‘아홉수’라 칭하는 시선이 불편했다. 


이런 내 마음을 조금 편하게 만들어 준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먼저 ‘아홉수’를 지난 인생의 선배님께서 해준 말이었다.


“미현아, 네가 잘 살아왔으면 아홉수를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인간은 각자 10년 주기로 배워야 할 것들이 있는데, 아홉수는 그 주기의 끝자락에 배워야 할 것들을 잘 배우지 못했을 때 뒤늦은 공부로 폭풍처럼 몰려오는 거야.”


아홉수는 그저 ‘미신’ 같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19살의 내가 다르고, 20살의 내가 다르다. 매년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나는 조금씩 더 성장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은 자란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나 실수와 실패의 경험에서 사람은 성장한다. 더 많이 부딪히고 깨질 때마다, ‘이 실수를 안 했다면 나는 평생 이걸 몰랐을까?’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내가 겪어온 부끄러운 경험들이 오히려 다행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니, 참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스물아홉 중간결산



정미현 님의 사진이 들어간 카드뉴스 커버 '음악에 담아내는 스토리텔링 연주회 스물아홉 중간결산'


하여간 뭐든 특별히 여기는 독특한 성격 탓에, ‘스물아홉’을 맞이하여 연주회를 기획했다. 르완다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 서울이 아닌 속초를 택하며 정신적 격동기를 겪던 때- 이왕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으니, 나의 29년을 정리하는 해로 삼아보고 싶었다. (그리고서 새로운 서른을 맞이하고 싶은, 완벽주의 성향의 ‘시작-병’이랄까나?)


강원문화재단의 생애최초지원(생애 처음으로 공공의 지원을 받는 예술가들을 위한 지원 사업)의 음악 분야로 작곡 발표회 기획서를 제출했다. 연주회 명은 그 이름도 거창한 <스물아홉 중간결산 보고>. 마치 어느 단체에서 1년의 끝자락에 결산보고회를 하듯, 나도 29년을 중간결산한 내용을 사람들 앞에서 보고하고 싶었다. 격식 있게!


감사하게도 재단의 생애최초지원에 선정되어 300만 원의 거금을 받고 연주회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무조건 해야만 한다. 곡을 써야 하고, ‘스토리텔링 연주회’라는 컨셉답게 나의 29년을 정리해 예술로 풀어내야만 한다. 



곡 창작 계획: 나이와 장소, 그리고 그 시기의 핵심 기억을 연결 지어 시간의 흐름에 따른 7개의 모음곡을 만든다. 장소가 가진 고유의 이미지와 특징을 음악적 요소로 풀고, 그때의 내가 가진 감정을 엮어 스토리텔링을 통해 표현한다.
곡 구성: 1) My Home - 다섯의 대구, 달콤씁쓸한 40년 한옥의 기억 / 2) Re-born - 열셋의 도쿄, 매일 죽음을 생각했던 내가 살고 싶어진 이유 / 3) Marks - 열일곱의 서울, 고시원방-하숙-기숙사, 내 작은 공간에서의 3년 / 4) A hope - 스물의 아프리카, 밤하늘의 셀 수 없이 많은 별들보다, 너는 소중해 / 5) A whole new world - 스물여섯의 미국, 그리고 유럽. connecting the dots / 6) Dream-resembler - 스물일곱의 르완다



인생을 어찌 ‘커팅’하듯 구분 지을 수 있겠냐 만은, 나를 한 뼘 더 성장시켰던 시기 별로 나누어 곡을 구성했다. 그래서 총 7개의 곡이 나올 예정이다. 그중 몇 곡의 작업노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Track 2. Re-born


● 악기 구성: 클라리넷, 바이올린, 피아노

 곡 설명: ‘생명’을 표현하는 클라리넷의 여리고 긴 호흡으로 곡의 시작과 끝을 구성해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표현함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 죽으면 어떨까? 저렇게 죽으면 많이 아플까? 매일 공상에 잠기던 때가 있었다. 삶의 의미나 재미를 찾지 못하고, 그저 눈을 감으면 딱 좋겠다고만 바라던 열세 살의 나. 엄마의 눈에는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기 조금 힘들어하는, 소심한' 딸로 보였을 것 같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선교단체의 캠프로 '일본 도쿄'에 보냈다. 내 또래 세 명의 여자아이들과 약 두 달의 시간을 동고동락하며 합숙을 하고, 약 10일 정도 도쿄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일본행 이후 내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은 싹 사라졌다.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냥- '살고 싶어'졌다.


열세 살의 여름 이후, 죽고 싶지 않았다. 더 오래오래 살고 싶어졌다. 딱히 이루고 싶은 꿈이 생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삶' 자체에 대한 욕심이 생겼달까.



Track 3. Marks


 악기 구성: 클라리넷, 바이올린, 피아노

 곡 설명: 곡의 중간에 고등학생 때 쓴 일기의 내용을 엮어 내레이션으로 표현함



열일곱 살에 가족으로부터 독립해 대구에서 경기도 부천으로 올라왔다. 늘 대구를 떠나 더 넓은 세상에서 사는 내 모습을 상상했고, 그래서 경기도의 한 공립 예고에 입학했다. 넉넉지 않았던 형편에, 난관은 산 넘어 산이었다. 기숙사는 완공되지도 않아서 학교 근처 번화가 사이의 작은 고시원 방에서 나는 나의 첫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복도 방보다 3만 원 더 비싼 방. 대구의 겨울과는 비교되지 않을 강추위에, 미니 난로로도 데워지지 않았던 내 침대 방. 그 안에서 나는 곡을 쓰고, 꿈을 키웠다. 가끔은 너무 추운 겨울바람에 길을 걸으며 울기도 했고, 어떤 날 새벽에는 술 취한 옆방 아저씨의 고함에 겁을 먹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옆집 아저씨가 주는 배추김치를 받아먹기도 하며, 나는 기숙사가 완공될 때까지 무탈하게 그곳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나를 키우고, 울리고, 달래서 지금까지 오게 한 시간, 내 고등학교 3년.



Track 7. The present


 악기 구성: 클라리넷, 바이올린, 피아노

 곡 설명: 피아노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연주에 클라리넷과 바이올린의 효과가 더해진 곡. 속초의 자연을 담은 파도, 바람, 물결의 느낌을 각 악기의 선율로 표현함. 앞선 여러 곡에서의 조금은 무겁고 우울한 정서를 환기시키는 밝은 느낌의 곡. 곡의 중간 또는 끝에 잠깐의 여백을 두고, 연주자와 관객 모두에게 생각의 시간을 제공함.



흘러 흘러 속초로 왔다. 

29년의 기다란 막대를 조각조각 내서 일곱 조각의 막대로 나누었다. 

조각의 색깔도, 온도도 모두 다르다. 


어떤 날들은 도망가고 싶을 만큼 추웠고, 

어떤 날들은 여기서 시간이 멈추길 바랄 만큼 따뜻했다. 

그 모든 조각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다시 이어보니- 

‘축복’이라 이름 붙일 수 있었다. 




공연 소개: 29년을 살다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29세. 20대의 끝과 30대의 시작 사이에 선 작곡가 정미현이, 지나온 29년을 정리하며 인생의 선배, 친구, 후배를 초대해 '스물아홉, 중간결산보고회'를 열고자 한다. 지극히 평범한 나이 '스물아홉'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관객들이 각자의 삶을 정리해보고 스스로 '중간결산' 내려 볼 수 있는 생각의 기회를 제공한다.

기획 배경: 1) 여전히 알아야 할 게 많은 스물아홉이지만, 29년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겪기에 충분한 시간. 열일곱 독립부터 스물아홉 속초까지, 많은 짐을 싸고 풀었다. 대구, 서울,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 새로운 세계로 옮겨갈 때마다, 내 마음의 세계 또한 넓어졌다. 20대의 끝과 30대의 ㅅ지ㅏㄱ 사이에 선 지금, 스물아홉의 정미현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싶다. / 2) '예술은 나를 표현하는 도구'라고 말하지만, 정작 나는 음악으로 나를 얼마나 표현해왔던가? '창작'은 늘 괴로움과 자괴감이 동반되어서, 선뜻 용기 내지 못했다. 게다가 '나의 진짜 이야기'를 담으려면 감정의 폭풍까지 경험해야 할 것이 눈에 선했다. 그럼에도 막연하게 '그 때'가 되면 음악으로 나에 대해 정리해보고 싶었다. 스물아홉의 지금이 왠지 '그 때'인 것만 같다.



2021년을 마무리하는 12월의 어느 토요일, 나의 첫 작곡 발표회 <스물아홉 중간결산 보고> 스토리텔링 연주회가 열릴 예정이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작곡가 정미현은 참 낯설다. 가장 오랜 시간 공부한 분야지만, 그만큼 가장 자신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학부 시절, 전공을 바꿀까 고민하던 내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이렇게 공부해놓으면, 언젠가 쓸 데가 있겠지.” 그 말에 작곡을 놓지 않고 졸업까지 했다.


지금이 그 ‘쓸 데’이자 ‘쓸 때’인 것 같다. 나의 주 분야인 ‘작곡’으로 서른을 맞이하기 전 29년을 정리하는 것. 









축복


속초에서의 삶도 벌써 2년 차에 접어들었다. 나는 아직도 ‘속초에 산다는 것’이 익숙지 않다. 서울에 2~3일 있다 보면 여전히 그곳에 사는 것처럼 익숙해지고, ‘그래서 내가 있던 곳은 어땠지?’ 하며, 마치 꿈을 꾼 듯 속초가 가물가물해진다. 때때로 서울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볼 때면 ‘내가 여기 있는 게 맞는 선택일까?’ 마음이 불안해지기도 하고, 그 불안함에 더 빡빡하게 속초에서의 삶을 채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속초에서의 지난 2년을 돌아보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선물’과도 같았다. 마음이 이끌려 이곳에 불시착한 것, 그래서 새롭게 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 상상만 해왔던 일들을 현실에서 이뤄가는 것. 그저 놀랍기만 하다. 나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기회들이 ‘행운’을 넘어 ‘운명’처럼 느껴진다. 


2020년 4월, 모든 게 꼬였다고 생각했던 날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괴로웠던 시간이, 지금은 180도 뒤바뀌었다. 속초에 오고서, 아니 속초에 왔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일을 상상하고 이뤄볼 수 있다는 설렘이 일상에 함께 한다.


‘아홉수’란 단어를 더 들을 일 없는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스물아홉의 끝에 서서 지나온 시간을 찬찬히 떠올려본다. 잊고 싶은 기억을 묻어두고 르완다로 떠났었는데, 묻어둔 기억이 다시 파헤쳐질 한국으로 오게 되어 많이 울었던 기억도 잠시 떠올려본다.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지난 29년의 경험들이다. 행복의 경험, 슬픔의 경험, 괴로움의 경험이 내 인생에 다양한 흔적을 새겨 ‘고유한 나’를 만들어냈다.

내 오른손등에는 작은 흉터가 하나 있다. 유럽의 숙소에서 깨진 거울에 베인 것인데, 아문 뒤에도 작은 흉터가 남았다. 처음 이걸 발견했을 때 ‘아, 나 프랑스에 진짜 갔었구나.’ 하고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 이 흉터를 볼 때마다 유럽이 생각나겠구나.’ 싶었고,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걸 볼 때마다 유럽을 떠올린다. 


모든 흔적에는 경험이 깃들어있다. 그래서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한, 우리는 그 경험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29년간 내게 새겨진 다양한 흔적들을 품고, 스물아홉의 내가 있다. 


어떤 날들은 도망가고 싶을 만큼 추웠고, 어떤 날들은 여기서 시간이 멈추길 바랄 만큼 따뜻했다. 그 모든 흔적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찬찬히 돌아보니- ‘축복’이라 이름 붙일 수 있었다.


축복 같은 나의 스물아홉. 곧 맞이할 서른은 더욱더 축복이길.



당신의 스물아홉, 나의 스물아홉, 우리의 스물아홉. '당신의 스물아홉에 대해 말해주세요.' 당신이 지나온 스물아홉은 어땠나요? 당신이 지나고 있는 스물아홉은 어떤가요? 당신이 지날 스물아홉은 어떨 것 같나요?







글·사진 정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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